사랑의 힘

from 쓰다 2004/03/15 03:46

아침에 외근이 있어 수원 방면 지하철을 탔습니다. 출근 시간을 훨씬 지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승객이 많더군요. 출입문 손잡이에 몸을 기댄 채 세월아 네월아 멍하니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참 지났을까... 독산, 시흥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초로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유독 제가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두 분이 자판기 커피를 들고 타셨기 때문입니다. 몸을 올리자마자 열차는 급하게 출발했고, 순간 기체의 흔들림으로 인해 아저씨 몸이 갸우뚱 휘청거립니다.

"앗!" 아저씨의 짧은 비명과 함께 커피가 손등으로 쏟아졌습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옆자리 승객들 순간 몸을 한발짝 뒤로 뺍니다. 스스로의 민첩함에 감탄을 하는 되먹지 못한  인간들.. 저 말고도 많았나 봅니다. 아저씨의 손등이 괜찮은 지 걱정보다 자기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다니 정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금세 얼굴이 빨개지더군요.

이러한 저의 스쳐가는 생각들과 붉어진 얼굴보다 더 빠르게 아저씨의 손등을 훑어가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아주머니의 옷자락이었습니다. 손수건, 휴지를 꺼내는 시간 조차도 늦었다 싶으셨던지 입고있던 소맷자락으로 아저씨의 손등을 닦는 아주머니.. 괜찮느냐고 묻는 듯한 걱정스런 아주머니의 눈길, 난 괜찮다 걱정마라 되려 아주머니를 안심 시키시려는 듯한 아저씨의 눈길...


두 분...
농아(聾啞) 이셨습니다.


그러고는 남은 커피를 다 마십니다. 아저씨는 아주머니의 빈 커피잔을 달라며 당신의 커피 잔과 함께 포개어 손아귀에 약간의 힘을 주어 그것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따뜻한 커피 한 잔 맛있게 잘 먹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몇 정거장 이후,  경로석에 자리가 났고 두 분 나란히 앉으셔서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다정스런 눈빛과.... 그리고 수화(手話).

학창시절부터 수화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  뭔가 있어보이는 듯한 착각..  막연히 그들을 이해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말입니다. 게으른  탓이겠지요... 동기부여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현재 저는 수화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오늘 일로 제가 다시금 수화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정말 그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땐, 이미 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손으로 말하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2004/03/15 03:46 2004/03/15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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