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년

from 쓰다 2004/07/23 10:50
2004.07.20.화.

am 7:35

서울. 지하철 2호선


장마끝 폭염이 시작됐다. 출근 길은 여지없이 붐빈다. 짧은 소매 밑으로 드러난 맨살들은 생면부지의 또다른 맨살들과의 부딪힘을 막고자 이리저리 피할 곳을 찾고 있다. 서로 부대껴봐야 더욱 화끈거리기만 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 시간에 충실하다. 신문을 넘기는 소리, 락인지 트롯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지지직하고 내 신경을 자극하는 가냘픈 소리... 이어폰 사이로 스믈스믈 기어나오는 그 인위적인 소음만 얍삽하게 지하철 안의 정적을 가르고 있다.


"뚜비두밥밥 뚜비둡~ "


더운 김을 뿜어내는 수많은 어깨들 너머로 생음이 정적을 깬다. 음성으로 봐선 아직 어리다. 일제히 사람들 발원지를 돌아다 보고... 나 역시 그를 찾는다. 학생이다.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있는 남학생이다. 인물도 훤하다.


한참을 노래인지 주문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반복하고 또다시 반복하고... 카랑카랑 목소리도 밝고 경쾌하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그냥 심심해서 하는 흥얼거림의 도는 이미 넘어선 상태다.(나름대로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다. -.-^)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데도 아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반복되는 강한 악센트가  인상적이다.


그러고는 소년은 어느 정류장에 내려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가버렸다.
사람들 모두 무엇에 홀린 표정이다.




2004.07.21.수.

am 7:40

서울. 지하철 2호선


지각이다.
어제보다 5분이나 늦었다. 아침시간 5분은 평소30분 이상의 가치가 있다.
더더군다나 오늘부터는 지하철 파업이다. ㅡ.ㅡ;;


오늘은 나도 음악을 들어보자. 이어폰을 꽂으니 마침 레드제플린-다이어메이커가 흘러 나온다.
역시 언제 들어도 좋은 노래다. 내 방안이었다면 이 노래에 맞춰 춤이라도 췄으리라.
반쯤 나오다가 음악 꺼져버린다. 밧데리가 다됐다. 듣지도 못하는 거 쌩으로 들고 갈려니 맥이 탁하고 풀려버린다.


"뚜비두밥밥 뚜비둡~  


어디보자... 귀에 익은 소린데.. 어..어?
아하! 어제 그 소년!


하루 지나, 평소보다 늦은 시각, 같은 지하철 칸에서 그 소년을 또 만났다.
(순간 나는 왜 반가웠던 것일까.... -.-;;;)
행동들은 여전하고, 어째 어제보다 목소리가 더 커진 듯하기도 하고...
랩인지 뭔 화풀이 옹알인지 기가막힌다. 참 잘한다.
(어제는 '별  싱거운 녀석 다 보겠네'가 솔직한 평이었었다)


어제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채 그 소년은 그렇게 자기 존재를 알린다.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일테지만, 그러나  나름대로 폼나는 음악활동(내용은 못 알아듣겠다. 우리말인 것 같기는 한데...)은 같은 시공간을 채우고 있던 우리들의 방어벽하고는 확연히 차이나는 당찬 행동인 것이다.


열려라 세상아!
하고, 힘찬 노크를 하는 것일까.


타인의 침입을 막고자 세운 우리들의 마음 속 울타리를 그 소년은 당장이라도 부숴버려라 하고 외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 확대 해석을 해 본다.


소년의 의식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이 오버스런 해석은 무미건조한 내 일상의 활기찬 이벤트로 다가왔다.



* 덧붙임 :
이보게 소년!
나 부탁하나 함세.
아침 출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의 그런 행동은 단발성으로 끝내주게.
그것이 잦아지면 자네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운 모습은 되려 따가운 눈초리로 돌아갈 것일테니 말야.
주의하게나!  후훗~ ^^



------------ 그 후 몇 차례 더 그 소년을 봤다. 자폐증을 앓는 것 같다. 부디 이겨내길... (2004.08..)


2004/07/23 10:50 2004/07/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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