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어떤 날 2005/10/20 12:59
컴퓨터 관련 케이블을 하나 선물 받았습니다. 오래된 친구가 오늘 택배로 보내왔어요. 아, 정말 반가운 일이죠.
시중에서 제가 산다한들 얼마 안 하겠지만, 작은 거 하나라도 챙겨주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택배를 부치면서 뽁뽁이 대신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박스 빈공간을 채웠으니 부끄럽다며 회사에선 열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더랬죠. 그러나 내용물이 무엇이든지 간에 내 이름 앞으로 물건이 도착하면 그 자리에서 안열어볼 수가 없잖아요?

자~ 개봉박두!
 
본인의 말대로 조그만 상자에 남김 없이 꽉 차도록 신문지를 돌돌 말았네요. 주먹만한 크기로 신문지가 여럿 말려있는데, 그 중 묵직하니 손에 잡히는 무엇. 신문을 펴보니 동그란 석류가 다소곳이 싸여있습니다. 포대기에 둘러싸인 어린 아기처럼 빨간 얼굴로... '풉'하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죠.

따스함에 기분 최곱니다. (^^)b
 
 




Tir na nog - Hey Friend



아, 이 글하고는 별개로, 석류를 보니 문득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네요. 석류가 주제는 아닌 시지만 석류하면 저는 무조건 이 시가 떠오릅니다. 저 강렬한 비유... 그리고, 오늘 석류 보내온 친구가 제 24세 때 들려 준 시죠. ^^;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치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 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2005/10/20 12:59 2005/10/2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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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박 2008/12/15 13:2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망록... 이 시를 처음 읽었던 스물네 살에 나는 저 말들을 이해했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