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즐겨읽기 2008/07/07 14:46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 향수 <조선지광>(1927)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라니... 어흑,
 



이동원, 박인수 - 향수


이 글의 관련글

2008/07/07 14:46 2008/07/07 14:46

Trackback Address >> http://www.zavak.com/trackback/25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뇽이 2010/07/23 23:5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 시 저도 엄청 좋아하는거에요 ㅋㅋ
    노래도 아주 예술이지요~~ 차마 꿈엔들 잊히리야...

    • 자박 2010/07/24 22:37  address  modify / delete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글 중 하나란다.
      내 마음, 내 기억, 아버지, 누이, 아내를 저렇게 표현하기란... 아, 어찌 아름답다 아니 할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