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순아 안녕!

from 쓰다 2007/12/12 14:17
10월말 즈음에 참깨알 보다 더 작고 가벼운 씨앗 몇 개를 종이컵 크기의 화분에 심었다. 내가 직접 산 것은 아니고 모은행에서 사은품으로 주던 것을 몇 주 묵히다 놀면 뭐하나 하는 심정으로 파종을 하고 다른 팀 창가 햇볕 잘 드는 곳에 올려놓았다. 사나흘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싹이 돋았다. 그리고 하루 걸러씩 꼬박꼬박 물을 주었더니 이 녀석 신통방통하게도 쑤욱쑤욱 잘도 자라더라. 카모마일이라는 허브다.

남(다른 팀 창가)의 집 더부살이 격으로 살다보니 엎어지기도 여러 번, 오가는 사람들 옷깃에 화분이 쓰러져 몇 줌 되지도 않는 흙을 실내 바닥에 토해 낼 때면 나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맨손으로 흙을 주워담아 다시금 목 좋은 햇살 아래 올려놓고 되려 일 친 이들 더러 조심하지 않고 왜 남의 귀한 화분을 메어치느냐며 호통 아닌 호통을 치기도 했다.

주말이면 실내 난방이 안되는 관계로 포장용 뽁뽁이 비닐을 적당히 오려 화분 크기에 맞게 비닐하우스도 만들어주었더랬다. 물도 듬뿍 주고 말이다. 아, 이름은 꽃순이다.

이렇게 꽃순이는 별탈 없이, 그리고 물과 햇볕 외에 다른 영양가 없이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아마도 나의 넘쳐나는 관심과 애정 덕분이었으리라.

그러나,

최근 내가 무엇에 정신이 팔렸는지 도통 이 꽃순이에게 사랑을 쏟지 못했는데, 오늘 출근하고 바로 들여다 보았더니 아뿔싸! 이 녀석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게 아닌가. 파릇파릇하던 싱그러운 잎은 누렇게 떠버렸고, 세 그루(?) 중에 두 그루는 아주 빼짝 말라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나마 양호한 한 그루도 보아하니 오늘내일 하겠다 싶다. 오오... 이런...

몇 분의 고민 끝에 나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 꽃순이를 과감히 그리고 매정하게 휴지통에 버렸다. 이미 늦어버렸음에 대한 미련을 갖을 필요가 없다는 결단이었다. 물론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본인의 책임감에 실망한 것이 크나 회생의 기운이 약한 것에 대한 기대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더이상 소모하기 싫은 이유도 있다 하겠다.

조그마한 화분에 감정이입이 지나친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 일로 나는 나의 성향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아니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집중을 흐리지 말 것. 타이밍, 적당한 시점을 잡아 낼 것,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말 것, 미련은 더욱 갖지 말 것, 더 큰 것을 바라 볼 것!

후~하고 불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를 아주 작은 씨앗으로 한 달 보름 동안 나는 나를 다듬었다. 이렇듯 꽃순이는 내게 큰 열매를 안겨다 주었다.

고마운 꽃순아, 안녕!
2007/12/12 14:17 2007/12/12 14:17

Trackback Address >> http://www.zavak.com/trackback/94

댓글을 달아 주세요